타산지석(他山之石) 태산북두(泰山北斗) 토사구팽(兎死狗烹) 퇴고(推敲)
他:다를 타. 山:메 산. 之:갈 지(…의). 石:돌 석.
[원말] 타산지석 가이공옥(可以攻玉).
[유사어] 절차탁마(切磋琢磨), 공옥이석(攻玉以石).
[출전]《詩經》〈小雅篇〉
다른 산의 거친(쓸모 없는) 돌이라도 옥(玉)을 가는 데에 소용이 된다는 뜻. 곧 ① 다른 사람의 하찮은 언행일지라도 자기의 지식이나 인격을 닦는 데에 도움이 됨의 비유. ② 쓸모 없는 것이라도 쓰기에 따라 유용한 것이 될 수 있음의 비유.
이 말은《시경(詩經)》〈소아편(小雅篇)〉'학명(鶴鳴)'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시(일부)의 한 구절이다.
‥‥‥‥‥
즐거운 저 동산에는 [樂彼之園(낙피지원)]
박달나무 심겨 있고 [爰有樹檀(원유수단)]
그 밑에는 닥나무 있네 [其下維穀(기하유곡)]
다른 산의 돌이라도 [他山之石(타산지석)]
이로써 옥을 갈 수 있네 [가이공옥(可以攻玉)]
[주] '타산지석 가이공옥(他山之石 可以攻玉)'-돌[石]을 소인(小人)에 비유하고 옥(玉)을 군자(君子)에 비유하여 군자도 소인에 의해 수양과 학덕을 쌓아 나갈 수 있음을 이르는 말.
태산북두(泰山北斗)
泰:클 태. 山:메 산. 北:북녘 북. 斗:말ㆍ별자리 두.
[준말] 泰斗(태두). 山斗(산두). [동의어] 여태산북두(如泰山北斗).
[출전] ≪唐書≫ 〈韓愈傳贊〉
태산과 북두칠성을 가리키는 말. 곧 ① 권위자. 제일인자. 학문ㆍ예술 분야의 대가. ② 세상 사람들로부터 우러러 받듦을 받거나 가장 존경받는 사람.
당나라 때 사대시인(四大詩人)의 한 사람으로서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 중 굴지의 명문장가로 꼽혔던 한유[韓愈:자는 퇴지(退之)]는 768년, 지금의 하남성(河南省)에서 태어났다.
그는 9대 황제인 덕종(德宗:779∼805) 때 25세의 나이로 진사(進士) 시험에 급제한 뒤 이부상서(吏部尙書)까지 되었으나 황제가 관여하는 불사(佛事)를 극간(極諫)하다가 조주자사(潮州刺史)로 좌천되었다. 천성이 강직했던 한유는 그후에도 여러 차례 좌천ㅗ파직(罷職) 당했다가 재 등용되곤 했는데, 만년에 이부시랑(吏部侍郞)을 역임한 뒤 5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824년).
이처럼 순탄치 못했던 그의 벼슬살이와는 달리 한유는 '한유(韓柳)'로 불렸을 정도로 절친한 벗인 유종원[柳宗元:자는 자후(子厚)]과 함께 고문부흥(古文復興) 운동을 제창하는 등 학문에 힘썼다. 그 결과 후학들로부터 존경의 대상이 되었는데, 그에 대해《당서(唐書)》〈한유전(韓愈專)〉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당나라가 흥성한 이래 한유는 육경(六經:춘추 시대의 여섯 가지 경서)를 가지고 여러 학자들의 스승이 되었다. 한유가 죽은 뒤 그의 학문은 더욱 흥성했으며, 그래서 학자들은 한유를 '태산북두'를 우러러보듯 존경했다."
[주] 태산 : 중국 제일의 명산. 산동성(山東省)의 태안(泰安)에 있는 오악(五嶽) 중의 하나인 동악(東嶽)으로, 중국에서는 옛부터 태산을 성산(聖山)으로 추앙해 왔음.
북두 : 북두칠성(北斗七星)을 가리키는 말. 북두칠성이 모든 별들의 중심적인 존재로 받들어지고 있는 데서 남에게 존경받는 훌륭한 인물에 비유하고 있음.
토사구팽(兎死狗烹)
兎:토끼 토. 死:죽을 사. 狗:개 구. 烹:삶을 팽.
[원말] 교토사 양구팽(狡兎死良狗烹)
[동의어] 야수진 엽구팽(野獸盡獵狗烹)
[유사어] 고(비)조진 양궁장[高(飛)鳥盡良弓藏].
[출전]《史記》〈淮陰侯列傳〉,《十八史略》,《韓非子》〈內儲說篇〉
토끼 사냥이 끝나면 사냥개는 삶아 먹힌다는 뜻. 곧 쓸모가 있을 때는 긴요하게 쓰이다가 쓸모가 없어지면 헌신짝처럼 버려진다는 말.
초패왕(楚?王) 항우(項羽)를 멸하고 한(漢)나라의 고조(高祖)가 된 유방(劉邦)은 소하(蕭何)ㅗ장량(張良)과 더불어 한나라 창업 삼걸(三傑)의 한 사람인 한신(韓信:?∼B.C.196)을 초왕(楚王)에 책봉했다(B.C.200).
그런데 이듬해, 항우의 맹장(猛將)이었던 종리매(鍾離昧)가 한신에게 몸을 의탁하고 있다는 사실을 안 고조는 지난날 그에게 고전한 악몽이 되살아나 크게 노했다. 그래서 한신에게 당장 압송하라고 명했으나 종리매와 오랜 친구인 한신은 고조의 명령을 어기고 오히려 그를 숨겨 주었다. 그러자 고조에게 '한신은 반심을 품고 있다'는 상소가 올라왔다. 진노한 고조는 참모 진평(陳平)의 헌책(獻策)에 따라 제후들에게 이렇게 명했다.
"제후는 초(楚) 땅의 진(陳:하남성 내)에서 대기하다가 운몽호(雲夢湖)로 유행(遊幸)하는 짐을 따르도록 하라."
한신을 진에서 포박하든가 나오지 않으면 제후(諸侯)의 군사로 주살(誅殺)할 계획이었다.
고조의 명을 받자 한신은 예삿일이 아님을 직감했다. 그래서 '아예 반기를 들까'하고 생각해 보았지만 '죄가 없는 이상 별일 없을 것'으로 믿고 순순히 고조를 배알하기로 했다. 그러나 불안이 싹 가신 것은 아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교활한 가신(家臣)이 한신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종리매의 목을 가져가시면 폐하께서도 기뻐하실 것이옵니다."
한신이 이 이야기를 하자 종리매는 크게 노했다.
"고조가 초나라를 치지 않는 것은 자네 곁에 내가 있기 때문일세. 그런데도 자네가 내 목을 가지고 고조에게 가겠다면 당장 내 손으로 잘라 주지. 하지만 그땐 자네도 망한다는 걸 잊지 말게."
종리매가 자결하자 한신은 그 목을 가지고 고조를 배알했다. 그러나 역적으로 포박당하자 그는 분개하여 이렇게 말했다.
"교활한 토끼를 사냥하고 나면 (쓸모가 없어져) 좋은 사냥개는 삶아 먹히고[狡?死良狗烹(교토사양구팽)], 하늘 높이 나는 새를 다 잡으면 좋은 활은 곳간에 처박히며[高鳥盡良弓藏(고조진양궁장)], 적국을 쳐부수고 나면 지혜 있는 신하는 버림을 받는다[敵國破謀臣亡(적국파모신망)]고 하더니 한나라를 세우기 위해 분골쇄신(粉骨碎身)한 내가, 이번에는 고종에게 죽게 되었구나."
고조는 한신을 죽이지 않았다. 그러나 회음후(淮陰侯)로 좌천시킨 뒤 주거를 도읍인 장안(長安)으로 제한했다.
[주]《십팔사략(十八史略)》에는 고조(高鳥)가 비조(飛鳥)로, 양구(良狗)가 주구(走狗)로 나와 있으나 뜻은 같음.
퇴고(推敲)
推:밀 퇴ㆍ옮을 추. 敲:두드릴 고
[출전]《唐詩紀事》〈卷四十 題李凝幽居〉
민다, 두드린다는 뜻으로, 시문(詩文)을 지을 때 자구(字句)를 여러 번 생각하여 고침을 이르는 말.
당나라 때의 시인 가도[賈島:자는 낭선(浪仙),777∼841]가 어느 날, 말을 타고 가면서〈이응의 유거에 제함[題李凝幽居]〉이라는 시를 짓기 시작했다.
이웃이 드물어 한거하고 [閑居隣竝少(한거린병소)]
풀숲 오솔길은 황원에 통하네 [草徑入荒園(추경입황원)]
새는 연못가 나무에 잠자고 [鳥宿池邊樹(조숙지변수)]
중은 달 아래 문을 두드린다 [僧敲月下門(승고월하문)]
그런데 마지막 구절인 '중은 달 아래 문을……'에서 '민다[推]'라고 하는 것이 좋을지 '두드린다[敲]'라고 하는 것이 좋을지 여기서 그만 딱 막혀 버렸다. 그래서 가도는 '민다''두드린다'는 이 두 낱말만 정신없이 되뇌며 가던 중 타고 있는 말이 마주 오던 고관의 행차와 부딪치고 말았다.
"무례한 놈! 뭣하는 놈이냐?"
"당장 말에서 내려오지 못할까!"
"이 행차가 뉘 행찬 줄 알기나 하느냐?"
네댓 명의 병졸이 저마다 한 마디씩 내뱉으며 가도를 말에서 끌어내려 행차의 주인공인 고관 앞으로 끌고 갔다. 그 고관은 당대(唐代)의 대문장가인 한유(韓愈)로, 당시 그의 벼슬은 경조윤(京兆尹:도읍을 다스리는 으뜸 벼슬)이었다.
한유 앞에 끌려온 가도는 먼저 길을 비키지 못한 까닭을 솔직히 말하고 사죄했다. 그러자 한유는 노여워하는 기색도 없이 잠시 생각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내 생각엔 역시 '민다'는 '퇴(推)'보다 '두드린다'는 '고(敲)'가 좋겠네."
이를 계기로 그후 이들은 둘도 없는 시우(詩友)가 되었다고 한다.
[주] 가도 : 당나라의 시인. 하북성 범양(河北省范陽) 사람. 자는 낭선(浪仙). 일찍이 불문(佛門)에 들어감. 법명(法名)은 무본(無本). 한유(韓愈)와의 사귐을 계기로 환속(還俗)한 후 시작(詩作)에 전념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