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금생활

남편같은 연금 -동상수상작-

항상 좋아요. 2010. 2. 12. 08:19

연금생활수기 공모 동상수상작 - 남편 같은 연금 김계선 유족연금수급자

 

  그이가 먼 길 떠나가던 날 새벽, 병동 유리창에 하얀 서리가 얼어붙던 차디찬 겨울이었습니다.

그이를 닮은 낙엽들이 병동 뒤뜰에 하얗게 퇴색되어 죽어갔습니다.

당시 부산시청 사무관으로 재직하던 그이를 그렇게 떠나보내고 말았습니다.

애들 데리고 어떻게 살 것인지? 불면의 날들과 외로움이 소름처럼 돋아나고 마음은 안정을 찾지 못하고 부표처럼 둥둥 떠 있는 날이 많았습니다.

나는 어떻게든 이 아이들 데리고 모질게 살아야 한다고,

누가 내 슬픔을 누가 내 괴로움을, 알아주고 도와줄 사람 없다는 걸 나는 잘 압니다.

 어쩌면 슬픔 따위는 내게는 사치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슬픈 꿈에서 어서 깨어나 일어서야 합니다.

나는 그리 큰돈도 못 되는 연금을 일시금으로 받을 것인지 연금으로 할 것인지를 결정하지 못하고 지인들에게 물어 보기도 했습니다.

어떤 이는 목돈을 받아서 이자를 받아 생활하면 원금을 살릴 수 있다고 하고,

또 어떤 이는 자식들은 저희들이 자립해서 살아갈 수 있으니까 액수가 적어도 연금으로 하면 평생 완전하게 자식들한테 손 벌리지 않아도 된다고도 했습니다.

그때 제 작은 욕심으로는 일시금으로 받아서 가게 딸린 작은 집이라도 사면 원금도 살리고 집도 가질 수 있지 않을까 하고 망설이기도 했습니다만 생전에 남편이 “내가 죽으면 퇴직금은 연금으로 하는 게 좋을 거”라는 유언을 따라 연금으로 결정하기까지 육 개월이나 퇴직금을 수령하지도 못하고 그대로 두기도 했었습니다.

그때 은행금리도 꽤 괜찮은 편이어서 연금으로 결정한 뒤에도 아쉬움이 많이 남았습니다.

봄이 오려는지 바람이 제법 부드러운 날 고향 진주에서도 멀리 떨어져 있는 나동 공원묘지에 성묘를 갔었습니다.

까마귀 떼 울부짖는 적막한 골짜기엔 아직 흙도 채 마르지 않는 붉은 무덤에 벌레 먹은 낙엽 하나가 살랑살랑 춤을 추며 맴을 돕니다.

그날 밤 집에 돌아와 적은 글 성묘 길이 대구신문에 실렸습니다.

 

성묘 길

언젠가 나도 죽어 돌아올 빈 산
골짜기와 바람이 서로 부딪쳐 우는
황토빛 빈 산

바람소리 들으며 자는가 누웠는가
마음에 밟히는 사람 두고
차마 올 수 없었던 이 산에
내가 온 줄도 모르는 이 사람

골짜기 타고 흐르는
까마귀떼 우짖는 소리
네가 와서 잠든 이 산에
나도 죽어 돌아올 이 산

해는 西山에 걸리고
억새풀 발목 휘감겨
옛 맹세 바람 되어 날아간 하늘
한 줌 서러운 흙만 남긴 채


 

남편과 사별하고 오 개월 후 나는 고모할머님을 따라서 일본으로 소위 보따리 장사라는 것을 배우러 가게 되었습니다.

아이들도 아직 공부하는 형편에다 내가 뭐라도 하지 않으면 불안한 마음에 견딜 수 없었기 때문에 난 용감하게 따라나서게 되었습니다.

물건을 구입해서 포장을 하고 저녁을 먹고 나면 대리점 쪽에서 사우나에 차를 태워서 보내 주는데, 그것도 얼마 이상의 물건을 구입해야만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말도 통하지 않는 사람들과 목욕을 하고 가운을 입고 실내를 돌아보면 무대를 겸한 연회실 같은 곳에서 일본인들은 가운을 입고 허리띠를 허리에 매지 않고 모두 배에다 흘러내릴 듯이 매고 무대에서 노래를 하곤 했습니다.

여자들 침실에서 매트 하나씩 깔고 누웠으면 그리도 잠은 오지 않았습니다.

 한국여자들 자는 모습을 지켜보노라면 저 여자들도 나와 같이 남편을 잃고 이 먼 곳까지 돈 벌러 왔나 보다하는 가엾은 마음에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며 잠들지 못했습니다. 사실 그 여자들이 나와 같은 처지인지도 잘 모르면서….

그 사람은 떠났어도 세월은 흐르고 연금도 공무원 봉급이 오르는 데로 조금씩 따라 올랐습니다.

아이 둘 다 공부도 끝나고 내 보따리 장사도 끝을 냈습니다.

한가해진 시간에 일본에서 말이 통하지 않아서 곤란했던 일을 기억하며 문화센터에서 일본어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의외로 재미있고 공부하는 보람도 느껴졌습니다. 초급에서 중급·고급반으로, 세월이 흘러갈수록 내 머릿속에는 수많은 단어들로 채워지고 나는 한일우호교류회에도 나가서 유창하지 못한 일본어 실력을 발휘하기도 했습니다.

2002부산아시안게임에 동서대학 체육관에서 일본인들을 안내하는 자원봉사도 하면서 웃지못할 해프닝도 일으키곤 했답니다.

 봄, 가을 한일우호가요대회에서 일본인은 한국노래로, 한국인은 일본노래로 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한 아이가 취직을 하고 결혼을 해서 내 곁을 떠나가고 한 아이를 데리고 습관처럼 결혼한 아들이 퇴근해서 돌아오는 시간을 기다렸습니다.

그럴 때마다 이제 그 애는 내 곁에 없어 다른 세계에서 사랑하는 사람과 행복을 일구며 사는데 내가 자꾸만 아들에게 연연하면 안 된다고 자신을 타일렀습니다.

다행히 며느리가 인상도 좋고 겸손해서 마음에 들었습니다.

어서 예쁘고 건강한 손자가 태어나기를 기다리는 마음이 간절해지는군요.

아들 내외와 저녁을 함께하는 즐거운 시간에는 그이와 함께할 수 없는 빈자리가 너무도 크게 느껴지기도 했었습니다.

아들이 결혼하고 이삼 년이 흘러가고 우리 경제에 위기가 닥쳐왔습니다.

기업이 무너지고 다들 너무 힘들어하고 환율은 다락같이 올라가고 은행의 금리도 바닥으로 나날이 떨어져 호구지책(糊口之策)을 해결하기도 어려운 가정이 생기면서 가족이 동반 자살하는 일도 뉴스에 보도 되었습니다.

 이럴 때마다 나는 연금의 고마움을 뼈저리게 느끼며 연금을 선택했던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신께 감사하며 내가 연금을 선택하도록 이끌어주신 지인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그래도 나는 힘들이지 않고 취미생활을 하면서 내가 좋아하는 책 한 권이라도 사볼 수 있고 자신을 갈고 닦아 세월에 녹슬어 가는 머리에 비타민 같은 독서를 통해서 길을 찾고 사회에 나가서도 덜떨어진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서 부단한 노력을 아끼지 않을 것입니다.

남편 같은 연금이 있는 한 건강하기만 하다면 더 이상 욕심 부리지 않겠습니다. 시작하는 월요일엔 일본어 공부를 목요일엔 한국무용을 하면서 일주일은 그렇게도 젊은 날의 내 청춘과 같이 바삐 바삐 지나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