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금생활

다시 시작하는 여정 -동상수상작-

항상 좋아요. 2010. 2. 12. 08:25

연금생활수기 공모 동상수상작 - 다시 시작하는 여정 최영모 연급수급자(전 대구 관음중교)

 

  퇴직을 한 지도 벌써 횟수로 6년의 세월이 흘렀다.

시간의 속도감은 여전하고, 나를 태우고 달리는 차창 밖 풍경들도 많이 바뀌었다.

 결혼을 한 딸들은 못 보던 손자들을 하나둘 데리고 집을 드나들기 시작했다.

나는 휘하에 세 명의 손자를 거느리고 있었는데 승격되어 총 여섯 녀석들의 할아버지로 새롭게 책임을 떠안았다.

바뀐 것은 그뿐만이 아니다.

그 사이 나 자신도 적잖이 변했다.

숱이 더 적어지고 눈은 더 컴컴해졌으며 이는 제 풀에 쓰러지기 시작해 치과를 제집 드나들 듯 하고 있다.

가끔씩 가던 길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본다.

오랫동안 나의 세계를 이루고 있던 학교를 뒤로하고 이정표도 없는 그 황량한 거리에 섰을 때의 기분이 복귀하듯 되살아난다.

 익숙해 지다보니 때로는 학교가 그냥 직장처럼 여겨질 때가 많았지만 어디까지나 교사로서의 내 삶을 지탱한 건 분명 소명의식이었다.

 지나고 보니 그것이 더 확연하게 다가온다.

교직이 안정적인 생계수단쯤으로 폄하되는 요즘의 현실에서도 분명 일선에선 교사로서의 자아를 고민하며 그 끈을 붙들고 있는 이들이 훨씬 더 많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지금의 젊은 그들에게 나 역시 최소한 부끄럽진 않다.

새 신발로 갈아 신고 바람 부는 거리로 쏟아져 나온 많은 퇴직교사들의 뒷모습에서 젊은 그들이 딱히 나를 알아볼 순 없다고 쳐도 나는 최소한 당당한 익명이다.

퇴직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이었다.

딸이 문득 생각난 듯 말을 꺼냈다. “아빠. 앞으로 뭐 하실 거예요? 뭐 생각해 둔거라도 있으세요?” 식구들은 남아돌기 시작한 나의 시간에 관심이 많았다.

 문화센터나 대학 평생교육원의 팸플릿을 가져다가 연신 눈앞에 들이밀었다.

나는 지나치게 신중했던 것인지 아니면 그다지 새로운 시도에 대한 의욕이 없었던 것인지 내 속마음도 정확하게 규정하지 못한 채 일단 하나를 골라 수강신청부터 했다.

초심자를 위한 수지침 강의. 수강에 꼭 필요하다는 침구세트도 샀다.
고민을 거듭하다 시간에 쫓겨 막차를 탄 사람처럼 뭔가 우왕좌왕하는 느낌은 들었지만 그래도 무연고 선수가 소속을 찾은 것처럼 안정된 기분은 들었다.

수강생활이 지속되자 어느 정도 자신감이 붙었다. 스킬이 늘고 침구 케이스 안에 가지런히 누워있는 침들에도 애정이 생겼다.

물론 허준 같은 명의를 꿈꾼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침을 드는 순간 주위의 아픈 사람들이 하나둘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고 나는 그것을 못 본 척할 수 없었다.
문제는 이런 나의 호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다.

 식구들은 좀처럼 나에게 의술을 펼칠 기회를 주지 않았다.

딸은 한밤중에 심하게 체해 약을 먹어도 소용이 없을 때조차 나의 의술을 거부하고 기도의 힘으로 버텨보겠다고 했다.

그 후로도 난 계속해서 수지침 강의를 들으러 다녔지만 점차 흥미를 잃어갔다.

아내는 어느 정도 미안한 마음이 들었던지 어느 날 댄스 스포츠를 제안해 왔다. 우리는 의기투합했고 댄스 스포츠 취미반을 신청해 룸바, 자이브, 차차차 같은 라틴종목의 기초부터 배우기 시작했다.

나는 새 구두를 신고 아내와 함께 연습실 안을 부지런히 뛰어다녔다.

연습실 한 벽을 다 차지하고 있는 전면 거울에 뒤뚱거리는 내 모습이 낯설게 비쳤다. 아내와 나는 몸놀림이 둔하고 어색했지만 그래도 곧잘 잘 해낼 때도 있었고 우리는 차츰 재미를 붙여가며 그런대로 즐겁게 몇 달을 보냈다.

그러나 오르던 사기는 얼마가 지나자 다시 정점을 찍고 저하되었다.

 일주일에 고작 두 번 있는 강의였음에도 아내는 저녁반이었던 탓에 일일 드라마를 매번 놓치는 것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는 일이 많아졌다.

 나도 드러내 말하지는 않았지만 슬슬 귀찮은 마음에 강의를 빠지려는 핑계를 찾는 일이 많아졌고 우리 부부의 이런 공감대는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커져갔다.

 나는 결국 또 댄스스포츠를 그만두었다.

몸에 딱 맞는 옷처럼 나에게 딱 맞는 취미거리를 찾기가 어려웠다.

나는 서재로 쓰고 있는 좁은 방안에 앉아 생각에 잠겼다.

창이 북쪽으로 나 있어 채광이 좋지 않은 탓에 낮에도 어두침침하고 늘 서늘한 방이었다.

하루 중 많은 시간을 그 방에 앉아 있노라면 괜히 햇빛이 그리울 때가 많았다.

그랬다. 그 방은 메마르고 삭막한 나와 닮은 것 같았다.

 나는 그 어두침침한 방처럼 무슨 일에서건 내 안의 열정을 끌어내지 못했다.

당뇨가 있었던 탓에 아침저녁으로 규칙적인 운동이 필수였지만 나는 그런 기본적인 것마저도 귀찮다는 이유로 빼먹기 일쑤였다.

그러니 그것보다 훨씬 더 소홀하기 마련인 취미생활은 어떻겠는가.

결국 문제의 핵심은 딱 들어맞는 취미를 찾지 못한 것보다 먼저 내 안의 열정을 끌어오는 일부터가 영 서툴렀다는데 있었다.

사실 열의와 열정은 타고 나는 게 아니라 가꿔가는 것이다.

우선 샘이 마르지 않도록 부지런히 그것을 내 안에서 길어 올릴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고인 그것이 썩지 않도록 항상 흐르게 해주고 변질되지 않도록 향기를 더하며

 새로운 숨결도 불어넣어줘야 한다.

거기다 계속 펴내어 쓰는 것도 중요하다.

쓸수록 샘솟는 우물처럼 내 안의 열정도 소모하면 소모할수록 샘솟는 것이다.

나는 일단 새로운 강의를 또 신청했다. 영어회화 초급반이었다.

고쳐먹는 마음에 새롭게 길들여지기가 쉬운 일이 아닐 테지만 이번에는 제대로 한번 해보고 싶었다.

주행선을 따라 똑바로 가지 못하고 비뚤비뚤하더라도 일단 계속해서 가는 것에 의의를 두었다.

그런 결의 탓인지 초급반을 무사히 끝낸 후 또 중급반을 신청할 수 있었다.

 몇 년이 지난 지금 나는 이제 매일 라디오 영어회화에 맞추어 소리 내어 연습을 하고 CNN을 부지런히 보려고 노력하기도 한다.

게다가 내가 사는 도시에서 열리는 세계 육상선수권 대회에 통역을 맡을 자원봉사자 모집에도 지원할 생각이다. 나는 아직도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